SF는 정말 끝내주는데

🔖 앞으로 나아가도록, 그리하여 지난 시절로 돌아갈 수 없도록 불가역적 변화를 야기하는 상호작용이야말로 SF가 재미있는 점이다. 물론 이 장르는 현실과 동떨어진 가상 세계를 만들어도 된다는 점에 치중하여 편안한 도피를 꿈꾸게 하기도 한다. 미국 서부를 무대로 나쁜 인디언을 죽이고 예쁜 여자를 얻는 이야기는 화성에서 나쁜 외계인을 죽이고 예쁜 공주를 얻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개연성이나 정합성에는 관심이 없고, 정치적 올바름 같은 거슬리는 제약은 치워두고, 주인공 및 그에 자신을 이입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실현하는 데 충실할수록 우리는 쉽게 현실을 회피할 수 있다. 그러나 SF는 모처럼 세계를 건드리는 장르인 덕분에, 가상의 세계에서조차 결국은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적극적으로 현실의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고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오래 살아남았다. 우리는 SF를 통해 우리가 살아온 세상 너머를 목도하고, 그 뒤로는 현실의 빈틈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가보지 않은 미래를 끌어당기고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를 경험시키는 일은 소설이 본래부터 해온 일지만, 여기서는 그런 일이 노골적으로 일어난다.


🔖 라비니아가 정말로 어떤 인물이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실제 그녀는 라틴어로 말하고 청동기 시절의 사람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2,000년도 훨씬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로마 이전의 라비니아, 베르길리우스의 흐릿한 라비니아, 르귄이 다시 쓴 현대의 라비니아는 시대를 무시하고 혼용된다. 겹겹이 중복되는 서술을 통해 라비니아는 불멸의 모호한 존재가 된다. 이 인물이 실제 역사와 동일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라비니아는 이야기 속에만 존재하지만, 지금도 충분한 호소력을 지닌 화자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죽음을 초월한다. "이해하는 것은 죽어 있는 것과 상관없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시이다." 이야기는 불멸이다. 그것은 모호하기에 언제나 다시 쓰일 여지가 있고, 기회를 얻을 때마다 거듭 되살아난다. 라비니아는 훌륭한 안내인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말을 전한다.

"우리 모두는 불확실한 존재이다. 적개심은 어리석고 옹졸하며, 분노조차 부적당하다. 나는 바다 표면에 하나의 빛나는 점일 뿐이며, 샛별에서 뻗어 나오는 어렴풋한 반짝임일 뿐이다. 나는 경외감 속에서 산다. 내가 살아 있지 않다면, 그래도 나는 바람을 타는 말없는 날개, 알부네아 숲 속에 형체 없는 목소리이다. 나는 말한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가라, 계속 가라." - <라비니아>, 116쪽


🔖 과학자의 일은 틀리는 것이다. 그래야 다음 사람이 맞을 테니까. 과학자는 가설을 세우고, 무너뜨리고, 다듬고, 그렇게 증명된 성과를 과학의 탑에 한줄씩 더한다. 다음 사람이 그것을 밟고 한 칸 높이 올라가도록. 과학이 혼자만의 믿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검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지식 체계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혼자서는 지탱할 수 없는 이 거대한 체계는 타인이 있기에 비로소 성립한다. 그것이 학자가 틀려도 괜찮은 이유고, 그럼에도 자신의 연구를 계속해야 할 이유다. 혼자가 아닌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은 새삼 간질간질하고 사랑스러운 경험이었다.